佛敎 說話 및 童話 (불교 설화 및 동화)
제 18 화 칠불통계 (七佛通戒)
칠불통계란 일곱 부처님(석가모니 부처님과 그 전 여섯 분의 부처님)의 공통 계율이라는 뜻입니다. 이 가르침에 따라 청정하고 맑은 마음으로 모든 더러운 생각을 떨쳐버린 사람은 절대 평화와 대자유의 경지인 해탈과
열반에 도달할 것입니다. 칠불통계란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악을 짓지 말고 諸惡莫作 (제악막작)
모든 선을 힘써 행하여 衆善奉行 (중선봉행)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 自淨其意 (자정기의)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是諸佛敎 (시제불교)
이와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중국 당나라 때 나뭇가지
위에 앉아서 선(禪)에 든다 하여 ‘새 둥지’라는 뜻의 조과(鳥窠)로 잘 알려진 지도림(支道林)선사가
있었습니다. 당대의 유명한 지식인 백거이(白居易)가 선사를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불법의 큰 뜻입니까?”
조과선사는 ‘칠불통계’의 가르침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백거이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것은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아오.
나무 위에 앉아있던 선사가
백거이를 타이르듯 말했습니다.
“세 살 먹은 아이도 알지 모르나 여든 된 노인도 이를 실천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렇습니다. 생각만으로는 쉬울 수 있는 단순한 진리도 그대로 실천해 옮기기는 어렵습니다.
불자들은 이를 정진하고 또 정진해야 합니다. 억지로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로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 가운데 계보다는 정과 혜를 먼저 추구하려고 애쓰는 경향이
많습니다. 예컨대, 선방에 오래 앉아 참선을 하면 마치
깨달음에 가까워진 것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이는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물물을 길어다가 쌀을 담가 불을 지펴 밥을 지은 다음 밥을 다 푸고 나서야 숭늉을 만들 수 있지요. 계 없이 정이 있을 수 없고, 정이 없이는 혜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면 계는 무엇인가요? 계를
흔히 우리를 얽매는 구속으로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계는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울타리이며 행복을 여는 열쇠입니다. 오계니 팔정도니 거창한 것 같아도 한마디로
정의하면 바로 선행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선봉행(衆善奉行)을
일컫는다는 이치가 바로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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