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 說話 및 童話 (불교 설화 및 동화)
제 21 화 본래성불(本來成佛)의 진정한 의미
대승불교에서는 본래성불(本來成佛)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중생은 본래 성불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잘못 이해하면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말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이미
성불했는데, 성불을 위한 수행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성불’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본래성불’이라는 말은 수행의 바른 길을 제시하기 위해 이야기된 것입니다.
마조 도일(馬祖 道一)선사가 남악 회양(南嶽
懷讓)선사 아래서 공부할 때의 일입니다. 도일선사는 날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부처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좌선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회양선사가 도일선사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무엇 하러 좌선을 하는가?” 도일선사가 대답했습니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 좌선을 합니다.” 이에 회양선사는 기왓장을
가지고 와서는 숫돌에 갈았습니다. 이것을 보고 도일선사가 물었습니다.
“스님은 무엇 때문에 기왓장을 숫돌에 갈고 계십니까?” 회양선사가 “이것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 셈이네.”하고 대답하자, 도일선사가 “스님, 기왓장을
간다고 해서 그것이 거울이 되겠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회양선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좌선을 한다고 해서 부처가 되겠느냐?”라고
되물었습니다. 이 말에 도일스님은 크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 대화를 잘 음미해 봅시다. 회양선사가 도일선사에게 좌선을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수행자들이 부처가 되기 위해서 수행을 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부처와 중생이라는 분별심이 있습니다. ‘나는 중생이다. 좌선을
하여 깨달으면 중생에서 부처로 변할 것이다. 이런 기대를 가지고 수행을 하는 사람은 바른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왓장을 숫돌에 간다고 해서 기왓장이 거울이 될 수 없듯이, 중생과 부처가 따로 있다면 중생이 수행을 한다 한들 부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참모습을 살펴보면
우리는 모두가 본래 청정한 비로자나불입니다. 다만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무명(無明)에서 갖가지 분별심을 일으켜 허망한 생사의 세계에 빠져 있을
뿐입니다. 수행은 허망한 生死의 세계를 일으키고 있는 無明과 분별심을 소멸하여, 자신이 본래 생사가 없는 부처임을 자각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본래성불’은 自我는 죽지 않는다는 상견(常見)도 아니고, 죽으면 사라진다는 단견(斷見)도 아닙니다. 생사라는 생각 자체가 無明에서 일어난 허망한
망상이므로, 無明이 있으면 망상에 의해 생사의 세계가 벌어지고, 망상이
사라지면 본래 청정한 法界의 실상이 드러난다는, 연기하는 세계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無明과 妄想을 버리고 실상의 세계를 깨닫는 것이 중도(中道) 수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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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표
지음 ‘불교란 무엇인가’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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