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3일 토요일

불교 주요 경전 (대승 1)



불교의 주요 경전 안내 (대승불교 1)



l   금강경(金剛經)          Diamond Sutra

반야심경과 더불어 반야(般若)의 공()사상을 대표하는 경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金剛般若波羅密經을 줄여서 金剛經이라고 부르며 선종(禪宗)에서도 중요하게 여기는 경입니다. 요진(姚秦)의 인도법사 구마라습이 처음 번역(서기412)하였으며 후에 당나라 현장법사, 의장법사 등의 번역이 있습니다.

석존께서 사위국 기원정사에 계실 때 수보리 존자 및 사부대중을 위하여 설하신 내용으로 처음에는 경계(境界)가 空함을 말하고, 다음에는 혜()가 空함을 보인 뒤 보살공(菩薩空)을 밝히고 있는데 금강경에서 사용하는 언어법은 매우 특이하여 보통사람들은 어렵다고 하겠습니다.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다만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니라.” “???”
이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금강경을 다소 현대어법으로 고쳐가면서 그 요점을 살펴보면.......

어느 때 부처님께서 평상시처럼 탁발에서 돌아와 공양을 마치신 후 발을 씻고 자리에 앉으시자,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깨달음에 뜻을 둔 보살은 어떻게 행동하여야 합니까?”
훌륭하구나, 수보리야. 무릇 보살은 이와 같이 마음을 항복시킬지니라. ‘나는 온갖 일체의 중생들을 남김없이 모두 열반에 이르게 하리라. 그러나 그러면서도 실은 완전한 열반을 얻은 자는 없으리라.’라고.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그에게 나라는 생각(我相)이나, 사람이라는 생각(人相)이나, 중생이라는 생각(衆生相)이나, 목숨이라는 생각(壽者相)이 있다면 이미 보살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니라.
또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머무르는 바 없이 보시해야 하느니라. 이른 바 육경(六境)과 사상(四相)에 머무르는 바 없이 보시할지니라. 왜냐하면 그가 이같이 모양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하면 그 공덕은 한량이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몸을 통하여 여래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겠느냐?”
볼 수 없나이다. 왜냐하면 세존께서 말씀하신 몸이란 몸이라 할 만한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하니라. 일체의 겉모양()은 모두 헛되나니, 만약 일체의 모든 겉모양이 사물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라고 본다면 그는 여래를 보게 되리라.  ( 1 四句偈)
수보리야, 수다원이 나는 수다원과를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아니올시다. 왜냐하면 수다원이란 성인의 흐름에 든 이를 일컫지만 정작 수다원은 그 자신 스스로 무엇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도리어 그는 성인의 흐름에 든 이라고 일컬어집니다
수보리야,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 칠보를 남에게 베푼다고 하더라도 이 경 가운데 한 구절을 깨달아 남에게 말해주는 공덕에는 미치지 못하리라. 내가 이 경전의 공덕을 다 말하게 되면 어떤 사람은 마음이 광란하게 되어 도리어 믿지 않을 지도 모를 만큼 이 경의 뜻은 불가사의하고 그 과보도 불가사의 하느니라.”

( 1 四句偈)     -   5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무릇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은 다 허망하다. 만약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볼 수 있다.


( 2 四句偈)     -   10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基心

응당히 어떤 사물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고, 또 소리 향기 맛 촉감 법 이런데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고, 응당히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 3 四句偈)     -   26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들으려 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4 四句偈)     -   32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모든 현상계의 법은 꿈과 같고, 물거품과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이니, 응당 이와 같이 관찰할지라




l   대품반야경 (大品般若經)  ,  소품반야경 (小品般若經)

대승불교 초기의 空사상을 설한 기본적인 경전입니다. 대품이 30~40 90품이나 되며 소품이 10 29품이나 된답니다. 이러한 방대한 량의 경전들을 극도로 축약한 것이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 하겠습니다.



l   대반야경 (大般若經)

반야부 계통의 경전을 집대성하여 부르는 이름으로 모두 16그룹 600권으로 나뉘는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져있으며 주로 육바라밀 중 반야바라밀을 강조하여 空사상을 설하고 있으며 이 중 제 577권인 능단금강분이라는 부분이 유명한 금강경이기도 합니다.



l   반야심경 (般若心經)

우리 불자라면 누구나 다 수지 독송하며 암송하고 있는 반야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을 줄여서 부르는 대승불교의 핵심경전으로, 대승불교의 근본경전인 반야부 경전의 요지가 이 경전 안에 담겨 있습니다. 이 경은 광본과 약본의 두 가지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우리가 지송하고 있는 것은 그 중 약본으로 현장법사의 번역본이라고 합니다. (원래 현장법사 번역본의 경 제목에는 마하가 없는데 이는 타 본에서 인용해와 오늘날의 관행본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반야심경의 앞부분에서는 마하반야바라밀다을 실천해야 하는 이유와 방법 등을 밝히고 있고, 뒷부분에서는 보살이 이것에 의해 마음의 흔들림이 없어지며 열반을 증득하고 삼세제불(三世諸佛)도 이에 의해 위 없는 올바른 깨달음을 얻는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비밀진언의 열여덟 자를 불가사의한 신통 묘력을 지닌 진실어(진언)이라고 칭하면서 원음 그대로 읊고 있습니다. 

참고로 2011 10 5일에 조계종 종무회의 의결을 거쳐 공포된 한글반야심경을 옮겨 적어 보겠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한글)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지느니라.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 수 상 행 식도 그러하니라. 사리자여! 모든 법은 공하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이 없고 수 상 행 식도 없으며, 안 이 비 설 신 의도 없고, 색 성 향 미 촉 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고, 무명도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고, 고 집 멸 도도 없으며, 지혜도 얻음도 없느니라.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느니라.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하고 밝은 주문이며 위 없는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알지니라.
이제 반야바라밀다주를 말하리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3)
(가자 가자 건너가자 건너편에 닿으니 깨달음이 있네)




l   유마경 (維摩經)

한편의 극본과도 같은 경전인 유마경의 주인공은 바이샬리라는 도시에 살고 있던 비말라키르티(유마)라는 長者이며 이 경에서는 그가 부처님을 대신하여 진리를 설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재가 신자에게 높은 비중을 둔 경전으로는 유마경 외에도 승만경이 있는데 거기에서는 승만부인이 주인공으로 이는 본래 보살이란 출가 수행자로서가 아니라 속인의 모습으로 중생속에서 보살행을 닦기 때문이며, 석가모니 부처님도 전생의 보살 시절에는 왕, 대신, 부호, 장군, 브라만 등을 거치셨음을 강조한 것이라고 합니다.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경의 서두 부분에 부처님께서 바이샬리 지방의 아무라파리 동산에 수많은 아라한들과 보살들과 수많은 신들과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다, 긴나라, 및 수많은 비구, 비구니, 재가신자들과 같이 계시며 설법을 하고 계실 때 보장이라는 보살이 세존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어떻게 불국토를 청정케 하나이까?”
좋은 집안의 젊은이들이여, 내 답하여 주리라. 이른바 중생이라는 국토야말로 보살의 불국토이니, 보시의 국토가 보살의 불국토이고, 계율의 국토가 보살의 불국토이니라. 또한 깨달음을 이루게 하는 37가지 길이 불국토이며 (37조도품을 말함), 모든 공덕을 일체 중생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불국토이니라. 젊은이들이여, 국토를 청정하게 하고자 하는 보살은 먼저 자기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마음이 깨끗함으로써 불국토가 청정해지기 때문이니라.”
이때 사리불 존자가 문득 의심이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깨끗한 행을 닦아오신 세존이 계신데도 왜 이 세계는 깨끗하게 보이지 않을까?’
그러자 세존께서는 사리불 존자가 의심하는 것을 아시고는 말씀하셨습니다.
사리불이여, 해와 달은 깨끗하지만 소경에게는 보이지 않느니라. 그러나 그것은 소경의 잘못일 뿐, 해와 달의 잘못은 아니니라.”
그런 뒤 세존께서는 자비심으로 신통을 보여 이 세계가 엄청난 양의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 후 신통을 거두셨으나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무상(無常)의 진리를 깨달았고, 깨달음을 향한 큰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그 무렵 바이샬리에는 유마라는 장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아주 오랜 과거생에서부터 무수한 부처님을 모셔왔고 이미 반야바라밀을 완성하였으며, 모든 법을 완전히 알았으면서도 짐짓 세속에 머물며 온갖 곳을 거리낌없이 드나들며 그들을 진리로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깊은 뜻을 지니고 짐짓 병을 앓고 있는 것처럼 하면서 눕자 많은 사람들이 위문하러 갔는데 그때마다 그는 진리를 설하곤 하였습니다.
벗들이여, 이 육신은 무상하고 단단하지 않으며 믿을 수 없고 파멸하는 것이며, 단명하고 괴롭고 병이 많고 변화하는 것이요. 그에 비해 여래의 몸은 진리 그 자체로서 지혜로부터 나오고 삼매로부터 나오며, 해탈로부터 나오고 자비로부터 나오며, 기울어지지 않는 마음으로부터 나온다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 의해 깨달음을 향한 발심을 하였는데 세존께서는 유마거사의 생각을 넌지시 짐작하시고 먼저 사리불 존자에게 병문안을 다녀오도록 이르셨지만 사리불 존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자기는 자격이 없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목갈라나, 카사파, 수보리, 우발리, 라훌라 등 대제자들에게 문병을 권했으나 모두들 옛 기억을 더듬으며 자신들도 자격이 없음을 고백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문수보살이 답하기를 저 또한 그를 감당할 수 없겠사오나 능력껏 담론해 보겠습니다.”하고는 수많은 아라한들과 신들, 천인 천녀들, 보살들과 함께 유마거사의 집으로 향하였습니다. 이때 유마거사는 미리 이를 알고 사방 열자(3m) 크기의 자기 방을 텅 비워 놓았습니다. (空을 상징)

조금 뒤에 문수보살이 도착함으로써 문수보살과 유마거사 사이에 고도의 진리 문답이 시작되었는데.. 문수보살이 병은 무엇에서 생겼습니까? 이제 얼마나 지났습니까?”하고 묻자, “문수보살님, 無智가 남아 있고 애착이 남아 있는 한 제 병은 계속될 것입니다. 중생에게 병이 있는 한 제 병도 계속될 것입니다. 보살이 윤회 속에 머무르는 것은 실로 중생을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거사시여, 집이 텅 비어 있는데 가족은 없습니까?”
문수보살님, 불국토도 텅 빈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텅 비었습니까?”   텅 빈 그것으로써 텅 비었습니다.”
텅 빈 그것은 인식될 수 있습니까?”   인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식 또한 空인 것입니다.”
그 空은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모든 중생의 마음이 처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거사님, 보살은 어떻게 병을 위문하여야 합니까?”
몸은 無常하다고 말하며 위문해야 합니다. 그러나 몸을 싫어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몸은 덧없는 것이지만 그것을 버리고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버리지도 말고 애착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런 뒤에 둘이 아닌 이치 즉 不二法에 대해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보살들이 차례로 不二法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생겨나고 없어짐이 둘이요, 생겨남도 없어짐도 없음을 깨달음으로써 不二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 끝에 마지막으로 문수보살이 不二法을 정의하길 여러분 말씀이 다 좋으나 아무런 말도 없고 아무런 표시도 없는 그것이 不二인가 합니다.”하고는 유마거사에게 한 말씀 해주기를 청하자 유마거사는 잠잠히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문수보살이 크게 감탄하며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不二로 들어가는 것! 거기에는 문자도 말도 마음의 작용도 없기 때문입니다.”

유마경 가운데 『한 마음이 깨끗하면 그 세계가 깨끗하다』와 『중생이 아프므로 보살이 아프다』는 가르침이 가장 유명하며, 또한 유마거사가 不二를 말로 설명하지 않고 침묵으로 보여준 것은 언어의 속임수를 늘 경계하는 불교의 전통에 비추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거기에서 역설적으로 『유마거사의 침묵이 마치 우레 소리와 같았다』 는 칭송도 생겨났다고 합니다. 



l   해심밀경 (解深密經)

<해심밀경>은 기원후 300년 전후에 성립된 중기 대승경전으로 <심밀해탈경> 이라고도 합니다. 5권으로 당나라 현장(玄奬)법사가 한역한 <해심밀경> (58)과 북위의 보리류지(菩提流支) 가 번역한 <심밀해탈
> (511)이 완역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마음이 어떻게 번뇌를 일으키는 지를 밝히는 유식(唯識)계열의 대표적인 경전이라고 합니다. 唯識이라 함은 일체 사물이 마음의 분별에 의해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뜻으로 삼라만상의 궁극적인 실재는 마음의 변현(變現)이라고 합니다.

불교의 중요 개념 중에 모든 사물은 조건에 의해(--> 연기법) 일어나고 유지되며 또한 소멸된다고 하였으며 그것을 극치까지 추구한 결과 모든 사물은 空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는데 이 어려운 논리의 출발 원점을 되돌아보면 그것은 삶의 온갖 문제들로(괴로움)부터 벗어난 대자유(해탈)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괴로움을 당하기도 하고 그로부터 벗어난 자유를 누리기도 하는 것은 나 자신이요, 그 중에서도 마음인 바 도대체 마음이 무엇이길래?’라는 주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되며, 그 질문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전개되다가 나중에 하나로 통합되게 됩니다. ---> 유식(唯識)계열 경전여래장(如來藏)계열 경전.

즉 유식계열에서는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번뇌를 일으켜 고통에 말려드는가를 밝히고, 여래장계열에서는 인간의 마음에 숨은 부처의 가능성을 극한대까지 들어내 보이는 것이니, 다시 말해서 유식계열에서는 인간이 얼마나 못났는가를 가르쳐 주고, 여래장계열에서는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습니다.
나중에 이 두 계열은 통합되어 일심이문(一心二門)사상, 진여문(眞如門 : 진리로서의 마음 -> 여래장)생멸문(生滅門 : 중생으로서의 마음 -> 유식)으로 정리되었는데 우리의 마음은 이 두 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 진여의 마음(여래장)은 허공에 비유되고, 생멸의 마음(중생심)은 허공에 피어난 구름에 비유되어 우리가 마음의 구름을 나라고 고집하지 않고 허공으로 돌아가면 그것이 곧 해탈인 것입니다.

해심밀경에서는 일체 사물에는 세 가지 성품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그 첫째로 일체 사물은 인간에 의해 이름 지어지고 개념 지어진다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둘째로 모든 사물은 서로 의지하여 존재한다는 의타기성(依他起性), 셋째로 상기 의타기성, 즉 空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변계소집성을 일으켜 집착으로 흘러 고통에 빠지게 되나 의타기성을 제대로 보면 모든 사물의 空한 모습 그대로가 곧 진리의
모습이 되는 원성실성(圓成實性)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장미꽃을 보되 (1)육안으로 보면 장미꽃의 외모만을 보게 되지만 (2)지혜의 눈으로 보면 장미꽃이란 수많은 요소들의 집합체에 불과하며 (3)깨달은 눈으로 보게 되면 그 요소들마저 텅 비었음()을 깨닫게 되어 집착할 게 없는 것, 즉 진정한 자유(해탈)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래 불교에서는 우리의 마음을 여섯 종류로 나누어 왔는데 그 중 신체에 해당하는 다섯 가지를 전오식(前五識 : , , , , 몸을 통해 얻는 인식)이라 하고 이 다섯 가지를 받아들여 인식하고 분별하는 여섯 번째 마음을 의식(意識)이라 하였으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가 자아, 인격, 자기라고 부르는 중심이 의식 뒤에 있지 않느냐는 의문이 생겨 그 일곱 번째 마음을 말나식(末那識 : 분별하고 생각하는 의식)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즉 이 말나식이 중심이 되어 우리의 모든 정신활동이 이루어지게 되며 만고 불변의 진리인 연기법에 따라 말나식 또한 항상 흐르고 변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인격인 말나식은 생각을 내기도 하고, 행동으로 옮겨지기도 하는데 그 생각은 자유로이 제 마음을 내는 게 아니라 (1) 마음 먹으면 쉽게 될 수 있는 면과 (2) 마음 먹으려 해도 더 큰마음에 눌려서 안 되는 면이 있는데 특히 (2)의 면이 있는 까닭은 길들여짐
에 있어 나쁜 길들여짐은 나쁜 쪽으로, 좋은 길들여짐은 좋은 쪽으로 말나식(인격)을 이끌고 가게 됩니다.
그렇다고 볼 때 길들여짐은 자기 말나식의 뿌리에 해당하며 이러한 길들여짐을 여덟 번째 마음으로 보는데 그것이 아뢰야식(阿賴耶識)인 것입니다. 즉 잠재심리, 무의식이라 할 수 있으며 이 또한 業의 근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우리가 자아, 인격, 자기라고 부르는 제7식인 말나식은 능동적인 측면에서는 1~6까지의 의식을 통해 자유롭게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의식하며, 수동적인 면에서는 자기의 뿌리요, 상관격인 제8식의 아뢰야식의 은근한 압력을 받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아뢰야식 또한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항상 흐르고 변화하는 것이며, 또한 아뢰야식이 말나식에 영향을 미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나식도 아뢰야식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인 말나식이 판단하고 행동한 길들여짐이 속속 아뢰야식이라는 정보창고에 입력이 되고 있는 것이며, 그러고 보면 아뢰야식을 만든 것은 말나식인 것이 되니 이처럼 서로 영향을 미치는 상호 관계가 성립되며 따라서 인간의 마음 또한 상호 의지하여 존재하는 연기의 한 모습일 뿐 결국은 空한 것임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현대심리학의 거두로서 무의식의 개념을 도입한 심리학자 융은 천 년이 넘은 불교의 유식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l   열반경 (涅槃經)

열반경에는 소승과 대승의 두 종류가 있으며, 소승경전은 석존의 입멸(入滅)에 대해서 설한 경전인 반면 대승경전에서는 대승교리를 주로 하여 열반이란 역사적인 사실에 佛性의 의미를 펼친 경이라 하겠습니다. 앞서 해심밀경에서 중생의 마음은 항상 불안하고 미혹에 가득 찬 여덟 겹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유식계열경전)고 한데 반하여 열반경과 같은 여래장(如來藏)계열의 경전에서는 일체의 중생에게는 부처로써의 해탈한 마음, 깨달은 마음, 깨끗한 마음, 자유로운 마음이 갖춰져 있다고 보고 있으며, 단지 우리 중생들 스스로가 業을 일으켜 그것을 덮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 또한 한 때는 중생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으나 깨달음을 성취하여 부처의 마음을 이루었으니 싯달타 시절의 중생의 마음 속에 이미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가능성이 곧 여래장(如來藏)이요, 佛性인 것입니다.

또한 열반경은 거기서 더 나아가 중생에게는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중생의 마음 그대로가 곧 佛性이요, 부처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그 같은 불성은 지극히 위대하여 거기에 머무는 부처님은 영원하고(), 즐겁고(), ‘가 있으며(), 깨끗하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 열반의 4()
그리하여 소승 열반경에서는 부처님이 법(가르침)만 남겨 놓은 채 떠나신 것으로 되어 있지만 대승 열반경에서는 부처님이 짐짓 떠나는 모습을 보이시지만 실은 불생-불멸이어서 지금도 항상 설법을 하고 중생을 건져 주시지만 소경이 해와 달을 못 보듯 다만 중생이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부처님의 지극한 위대함은 중생들에게도 낱낱이 갖춰져 있으나 스스로 나쁜 인연으로 흐르면 고통을 받고, 스스로 고귀한 인연으로 흐르면 해탈하여 부처를 이룬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섯 가지의 감각 기관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꾸준히 보살행을 닦아 成佛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즉 열반경은 부처님의 반열반을 소재로 삼아 空사상의 부정 논리를 뒤집어 대 긍정의 논리를 장대하게 펼치면서 삼라만상의 미물까지도 마침내는 다 구원될 것임을 가르치는 원대한 희망의 경전이라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의 교리에서는 한번 지옥에 가면 영원히 지옥이며 한번 천당에 가면 영원토록 복락을 누린다고 보고 있으나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당신에 대한 충성도에 따라 과보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짓는 인과의 법칙에 따라 과보가 주어지는 것인데, 중요한 점은 아무리 나쁜 짓을 했다 해도 그 죄의 무게가 무한대일 수는 없는 것이며 그의 지옥행 또한 끝나는 날이 있다고 봐, 그런 악인에게도 불성이 있어 그 불성 때문에 언젠가는 부처가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한편 이 세계는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성문-연각-보살의 9등급으로 구성되어 있어 모든 중생은 그 9단계의 차원을 오르내릴 뿐 결코 영원히 지옥이나 천상에 머무는 법이 없으나, 9등급의 세계 위에는 부처의 세계가 있고 그곳은 오르내림이 끝나는 종점인 것입니다. 따라서 오르내림이 있는 윤회의 고통세계는 부처의 세계에 이름으로써 모든 방황이 끝날 수 있으며, 만일 이러한 종착점이 없었다면 이 세계는 그대로 헛된 떠돎의 세계에 지나지 못했을 것이니, 사실 부처님의 위대하심은 이 종착점을 발견(깨달음)하심으로써 끝없는 오르내림과 방황, 고통과 즐거움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 무의미하고 허무한 중생세계에 확실한 이상(理想)을 제시하신 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체 중생에게는 佛性이 있기에 비록 시간이 걸릴지라도 마침내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은 마치 한 방울의 물방울이 우여곡절을 겪을지라도 최후에 도달할 곳이라고는 바다밖에 없는 것과 같다는 말씀이시니 모든 존재가 다 부처가 되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최고 최대의 긍정 사상을 여기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   일체중생 실유불성 (一切衆生 悉有佛性)         : 모두 실


열반경에는 그 유명한 설산동자(雪山童子)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주 오랜 옛날 부처님이 계시지 않던 시절, 히말라야 산속에서 설산동자가 열심히 도를 닦으며 깨달음을 추구하고 있던 중 하루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게송을 듣게 되었습니다.     제행무상 시생멸법  (諸行無常  是生滅法)’
세상의 모든 것은 항상(恒常) 됨이 없어, 한번 일어나면 반드시 무너지는 법
이에 설산동자는 그 게송에 진리가 깃들여 있음을 깨닫고 온몸이 떨리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가 하고 찾아보니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나찰귀 하나가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설마 저 나찰이 이런 부처님의 게송을 읊었을 리가 없을 텐데?’하고 생각하면서 물었습니다.
당신이 방금 그 게송을 읊었소? 그 게송은 절반밖에 되지 않으니 반드시 그 뒤의 절반 또한 알고 있을 것이오”,  나는 모르겠소. 하도 여러 날을 굶다 보니 정신이 어지러워 헛소리를 한 것 같소. 배가 부르면 혹시 나머지 구절이 생각날지도 모를까?”
그래 설산동자는 그 나찰귀가 게송의 절반을 읊었다고 판단하고는 정중히 예를 차리며 말을 건넸습니다.
틀림없이 당신이 그 게송을 읊었다고 생각하는데 나머지 반도 마저 읊어 주길 간절히 부탁하는 바요.” 하니 그 나찰귀는 배가 고파 더 이상은 못하겠소이다. 혹시 당신이 목숨을 던져 내 배고픔을 덜어준다고 하면 모를까.....” 그러자 설산동자는 , 알겠나이다. 내 이제 한 목숨을 당신께 드릴 테니 나머지 댓 귀도 읊어주시구려.” (이하 생략)
생멸멸이  적멸위락  (生滅滅已  寂滅爲樂)’       그 생과 멸이 함께 사라지고 나면 (집착을 끊으면), 그때 드러나는 고요함이야말로 참다운 즐거움이어라.‘





l   ()가경 (楞伽經)    ,   대승기신론 (大乘起信論)

능가경은 전 7권으로 서기 700년경 당나라 때 실차난타가 번역한 것으로 부처님께서 릉가산에서 대혜보살(大慧菩薩)을 위하여 여래장(如來藏) 및 연기(緣起)의 이치 등을 설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서로 다른 두 가지 측면, 즉 중생의 마음에서 바라보며 다룬 대표적인 경으로서 해심밀경 (유식계열)과 부처의 마음에서 바라본 열반경 (여래장계열)이 있는데 이 두 면을 하나로 합친 것이 능가경이 되며 이를 정리한 것이 대승기신론입니다. 특히 대승기신론은 경전이 아니고 경전을 철학적으로 조직화한 논()이지만 그 중요성은 일반 경()과 다름없는 최고의 작품으로 수많은 대승 종파에 영향을 주었고 중국 불교의 모든 경과 논 가운데 그 주석도 가장 많을 정도여서 대승불교의 총론서라고까지 칭송되는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대승기신론의 수많은 주석서 중에서도 제일로 꼽히는 것이 원효대사가 쓴 대승기신론소라고 합니다.
대신기신론에 의하면 대승(大乘)이란 다름아닌 한마음, 즉 일심(一心)이라고 하며, 그 마음은 두 면이 있다고 보아 유식계열과 여래장계열의 사상을 하나로 묶은 것입니다.

생멸문(生滅門) : 중생으로의 마음 (괴로움, 번뇌, 생로병사...)
진여문(眞如門) : 부처로서의 마음 (괴로움과 생사로부터의 초월)
그렇다고 해서 이 두 마음이 서로 나뉘어 있는 것은 아니어서 흔히 바다의 파도에 비유되곤 하는데 바다의 표면인 파도부분이 생멸의 마음이라면, 파도아래의 잔잔한 부분은 진여의 마음이라고 볼 수가 있어, 파도가 잠잠해지면 전부가 바다의 모습이 되고 잠잠하던 바다에 바람이 불면 없던 파도가 일어나는데 편의상 바다또는 파도라고 달리 부르지만 실은 그 모두가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마음도 그와 같아서 파도가 일 수 있는데 그것이 번뇌하는 중생의 마음이요, 파도가 잠잠해지면 곧 부처의 평화와 안락함으로 돌아갈 수 있어 결국 어느 면에서 마음을 보느냐에 따라 마음은 중생이라고도 불리고 부처라고도 불리게 됩니다.

그러나 파도의 구성요소가 바다이듯이 중생 마음의 근본은 부처의 마음이고, 그렇게 볼 때 중생도 실은 부처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중생이 본래 부처를 회복하려면 불법(佛法)을 깊이 믿고 열심히 마음을 닦아야 하는데, 한편 다시 생각해 보면 파도도 곧 바다이니 구태여 파도를 가라앉히느니 마느니 하는 생각조차 버리고 파도가 일고 가라앉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파도 치는 이대로가 그대로 바다(부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l   ()능엄경 (首楞嚴經)

능엄경의 본래 이름은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印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이라 하며 經은 먼저 아난다 존자가 탁발 갔다 오다가 처녀에게 물 한잔 얻어 마시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마등가라는 이름의 처녀는 미남인 아난다 존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주술사인 제 어미에게 부탁하여 존자를 자기 방으로 유인합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천안(天眼)으로 그 사실을 아시고는 신통으로 아난다 존자를 구하여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부터 도를 닦는 방법에 대하여 부처님과 아난다 존자간에 대화가 시작되는데.....

아난다여, 너의 마음은 어디에 있느냐?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그것을 다스릴 게 아니겠느냐?”
마음은 몸 안에 있는가 하나이다.”
그렇다면 몸 안에 있는 마음이 왜 너의 창자나 위나 심장을 보지 못하느냐?”
마음은 몸 밖에 있나이다.
그렇다면 그 마음이 너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이냐?”
이런 식으로 아난다 존자는 마음이 있는 곳을 여러 가지로 제시하였으나 부처님께서는 모순임을 밝히신 후 보는 성품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아난다여, 캄캄한 방에 등불이 켜져 사람이 물건을 보았을 때 그 물건을 본 것은 성품이니라. 또한 그 성품은 아무런 차별이 없느니라. 비유하면 허공은 모양이 없지만 모난 그릇에는 모난 허공으로, 둥근 그릇에는 둥근 허공으로 보이게 되느니라. 모든 중생들이 끝없는 옛적부터 자기의 본성품을 잘못 알아서 본마음을 잃어버리고 거짓된 육신과 감각되는 의식만을 마음이라 여기며 지배를 받게 되어 모든 것을 차별로 보기 때문에 괴로움이 일어나게 된 것이니라.
아난다여, 돋보기로 햇볕을 받아 쑥에 불을 붙일 때 불이 어디서 생기는 것이냐? 돋보기에서냐, 햇빛에서냐, 아니면 쑥에서냐?  그러나 셋 중 그 어느 것도 불이 아니요 다만 인연이 있어서 불이 일어 나는 바 인연이란 온 허공에 그처럼 가득한 것이니 나고 죽음이 없는 성품이 바로 그러하니라......”

그 밖에도 능엄경은 50가지 마장(魔障)을 가르치는 것으로 유명한데 도를 닦다 보면 여러 가지 정신 현상이 일어나게 되어 이를 50가지로 나눠 거기에 빠지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마장 가운데에는 무섭거나 싫은 것 뿐만 아니라 지극히 아름답고 신령스러운 모습이 보이기도 하는데 이 또한 자기 마음의 투영일 뿐 진실의 모습은 아니니 절대로 애착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l   원각경 (圓覺經)

원각경의 본래 이름은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으로 보조국사 이래 한국 불교에서 매우 중요시 하는 경전입니다. ‘원각이란 둥근 깨달음이라는 뜻으로, 둥글다는 것은 기울어진 데가 없이 원만하고 완전함을 가리키는데 다른 종교나 사상에 대해서도 그것을 적대시하지 않고 모두 끌어안아, 너와 내가 없는 대 긍정을 지향하는 불교에서는 대 긍정을 둥글다는 표현으로 즐겨 나타냅니다. 또한 진리에는 본래 모양이 없으나 할 수 없이 모양을 그릴 때에는 원을 사용하는데 이를 일원상(一圓相)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런 원의 의미로써 깨달음을 수식한 둥근 깨달음에 대해 가르치는 경전이 바로 원각경입니다.

이 경에서는 12명의 보살이 등장하여 각각 부처님에게 질문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원각의 이치를 밝히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보안보살과 질의, 응답 부분인 보안보살장이 불자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법화경하면 보문품이듯)  이 경에서 부처님은 먼저 문수보살에게 말씀하십니다.
선남자여, 둥근 깨달음이 있어 그로부터 온갖 깨달음과 열반과 수행법이 나오고 그것을 원만하게 비추어봄으로써 無明을 끊고 佛道를 이루게 되니라. 그렇다면 어떤 것이 無明인가? 일체 중생이 끝없는 옛적부터 제 성품을 잘못 알고 허망한 것을 나라고 앎으로써 생로병사의 괴로움이 일어나니 이것을 無明이라 하느니라.....  그것은 마치 눈병이 난 사람이 허공에 꽃이 있는 듯이 착각하는 것과 같아서 허공에는 실제로 꽃이 없는데 그가 스스로 꽃이 있는 듯이 착각하는 것과 같으니라.”
이번에는 보현보살에게 말씀하십니다.
선남자여, 일체 중생의 갖가지 지어진 것이 모두 둥근 깨달음에서 나왔으니 헛꽃이 허공에서 생긴 것과 같으니라. 그리고 그 헛꽃이 다 없어지더라도 허공만은 없어지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일체 보살과 말세 중생들이 온갖 허망한 지어진 것들이라고 여기는 생각을 멀리 없애야 하나니, 나아가 멀리 없앴다는 생각도 없애고, 다시 멀리 없앴다는 생각조차도 없애서..... 마치 나무 두 개를 서로 비벼서 불이 일어나면 두 나무가 다 타버리듯이 헛됨으로써 헛됨을 없애게 되느니라.
이어서 보안보살과의 대화가 이뤄집니다.
일체가 헛됨을 닦으려는 수행자는 먼저 주의집중을 닦고 계를 굳게 지키며 조용한 방에 단정히 앉아서 항상 생각하되 내 몸은 흙으로 돌아갈 것과 물로 돌아갈 것과 바람으로 돌아갈 것이 모여서 형상을 지은 것이니 모든 것이 헛되며 허깨비 같다고 관찰할 지니라.
지수화풍(四大)의 네 가지 원소들이 화합하여 여러 가지 감각 기관이 생기고 거기에 대상이 비침으로써 마음이라는 것이 생겨나나니, 이 모든 것이 흩어진다면 마음이란 찾을 수 없게 되느니라.
그러나 몸과 마음 등 헛된 것들이 모두 멸하여도 헛되지 않은 것(원각)은 끝내 멸하지 않느니라. 이것은 마치 거울의 때를 지운 것과 같아서 그렇게 되면 영원토록 사방이 청정하리라.
선남자여, 몸과 마음이라는 것은 모두 헛됨의 때이니라. 이 때를 모두 없앤 이를 보살이라 하거니와 때가 다 없어지고 나면 대()가 없어 이름 붙일 바가 없게 되느니라.
선남자여, 이런 마음을 닦아 익혀 성취하면 거기에는 닦은 것도 없고 성취할 것도 없느니라. 거기엔 둘()이 없으므로 천백만억 아승지-불가설-항하사 수효의 부처님 세계가 마치 헛꽃이 어지러이 피었다가 어지러이 사라지는 것과 같아서, 나고 죽음과 열반이 지난 밤의 꿈과 같은 줄을 비로서 알게 되느니라.
선남자여, 보살들은 이와 같이 수행하고, 이와 같이 방편을 짓고, 이와 같이 깨달아야 되나니, 이렇게 진리를 구한다면 마음에 아무런 답답함이 없으리라.”

()란 상대적인 대상을 말하는데 즉 저것은 이것의 對요, 여자는 남자의 對이며, 악은 선의 對요, 부처는 중생의 對이다. 그러나 허공 같은 둥근 깨달음에는 對가 없으니 즉 둥근 깨달음은 깨닫지 못함의 對가 아니라, 깨닫지 못함과 깨달음을 둘 다 합쳐서 초월하는 깨달음이기 때문에 둥근 깨달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이름, 즉 보살이니 부처니 하는 개념(이름)은 對가 있어야만 붙여질 수 있는데, 궁극의 경지는 對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깨달은 이를 말로는 이름 지을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부처님 세계는 부처님 세계가 아닌 세계의 對이고, 나고 죽음과 열반도 對가 되지만 최고의 경지에서는 이런 對가 모두 지난 밤 꿈속의 일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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