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주요 상식 정리 (3)
(10) 불멸(佛滅) 후 제 2 차 결집에서 문제가 되었다는 사안들
인도의 동에서 발흥한 불교
교단은 점차 서쪽으로 전파되어 나갔는데 불멸 후 어느덧 백 년이 흐르자
동, 서 교단의 모습에서 많은 변화가 나타나고, 특히 계율에 대한 인식과
융통성에 차이점을 수정코자
회의를 하게 되었다 함.(대체로 중서부의 교단은 보수적, 동북부 지역은 진보적이었다 함)
이때 중점 토의되었다는 열
가지 사안 중 작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사안은 다음과 같으며, 여러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1.
소금을 가지고 다니다가 음식에 뿌려 먹어도 좋은가? (본래는 휴대 못함)
2.
정오가 지나 해 그림자가 손가락 두 마디가 지나지 않았을 때까지는 점심 식사를 해도 좋은가?
(본래 정오 이 후에는 식사 금지로 당연히 저녁은 먹지 않음)
3.
충분히 식사한 후에 다시 한 번 공양 초청에 응해도 좋은가?
4.
………
5.
승단의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 전원이 모이지 않았다면 참석자만으로 결정하고, 늦게
도착한 비구에게 양해를 받아도
좋은가? (전원 참석이 원칙. 불참자는 위임해야 함)
6.
………
7.
………
8.
나무 열매즙을 발효하되 아직 알코올 성분이 없는 정도까지는 마셔도 좋은가? (발효 음식 금지)
9.
………
10.
금(전) 혹은 은(전)을 시주 받아도 좋은가?
이처럼 이런 정도의 융통성을
가지고 그런 큰 물의가 있었다니…… 놀라움을 갖게도 합니다.
(11)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점 열거
소승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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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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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 (실천 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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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적 (실천과 병행된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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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단위의 내적인 청정 추구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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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에 대한 희생과 봉사 강조 (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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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한이 목표 (가능하면 이번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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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가 목표 (세세생생 보살행을 닦은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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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자 우위 (엘리트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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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가자 중시 (서민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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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경전 고수 (시대 상황을 고려치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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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경전 창출 (시대 상황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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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선 중심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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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수행법 개발 (염불, 주력, 간경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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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어디까지나 인간. 그러나 일체진리를 깨치고는 인간과 신들의
스승이 되심.
(본받을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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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본질은 진리(法) 그
자체이시며, 싯달타태자로 태어나셨던 건 진리를 보여주기 위함임.
(신앙의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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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불(一佛)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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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불(多佛)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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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본래 불완전하니 완전하게 되기 위해 수행하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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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본래 완전하였으나 무명으로 모름.
따라서 그 착각에서 깨어나면 그대로 부처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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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정도(八正道)와 육바라밀(六波羅蜜)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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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正道 : 나를 밝힘
---> 지혜를 얻음 ---> 지혜로써 남을 인도 함
六波羅蜜 : 남에게 이익을 줌
---> 그를 통해서 나에게도 이익이 돌아와
불도를 이룸
(12) 108 번뇌와 108배에 대하여
불교에서 절하는 숫자에 대한
근거는 뚜렷하다. 3배를 드리는 것은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탐,진,치
三毒心을 끊고 三學(계,정,혜)을 닦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고, 53배는 참회 53佛에 대한 경배이며, 1천배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겁(現劫)의 1천 부처님께 1배씩 절을 올리는 거이고, 3천배는 과거,현재,미래의 3대겁에 출현하시는 3천 부처님께 올리는 예법이다. 그렇다면 108배는 무엇인가? 바로 이 절이
108번뇌의 소멸과 관련되어 있음을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108이라는 숫자가 108번뇌를 뜻한다는 것은 쉽게 파악하면서도, 어떻게 해서 중생의 번뇌를 108이라는 숫자로 분류하였는지를 분명히
아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108번뇌는 중생의 근본번뇌이다. 이 108번뇌는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이 서로 만날 때 생겨난다. 즉 눈,코,귀,혀,몸,뜻(眼耳鼻舌身意)의 六根이 색깔,소리,향기,맛,감촉,법(色聲香味觸法)의 六境과 만나면 자동적으로 좋다(好), 나쁘다(惡), 좋지도 싫지도
않다(平等)는 3가지 인식작용을 일으킨다.
그리고 다시 좋은 것은 즐겁게
받아들이고(樂受), 나쁜 것은 괴롭게 받아들이며(苦受), 좋지도
싫지도 않는것은 무덤덤하게 방치하는(捨受-사수) 것이다. 그리하여 상기 육근과 육경이 하나하나가 부딪칠 때마다 好,惡,平等,樂,苦,捨의 6가지 감각이 나타나기 때문에,
6 x 6 = 36, 즉 36가지의 번뇌가 생겨나게 된다.
이 36번뇌를 중생은 과거에도 했었고, 현재에도 하고 있으며, 미래에도 할 것이기 때문에, 6 x 6 에 과거,현재,미래의 3을 곱하여
6 x 6 x 3 = 108번뇌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108번뇌가 생겨나고 또 생겨나서
팔만 사천 번뇌망상을 이루게 되고, 이 같은 번뇌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무수히 왔다 갔다 하면서 마음을
흐트려 놓기 때문에 중생은 번뇌로 인해 시달리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08번뇌! 이것은
우리의 흩어진 마음을 뜻한다. 하나로 모아진 마음이 아니라 바깥으로 흩어진 마음, 근원을 돌아보는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 나가는 유전(流轉)을 뜻하며 이와 같이 108번뇌와 깊이 결속되어 있는 삶이 중생의
삶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108번뇌는 108번의 절을 하는 동안 스스로 순화되어 삼매(三昧)의 힘으로 변화된다.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일심의 원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환멸(還滅)의 시간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무한한 능력, 영원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마음이 번뇌를 따라 밖으로 밖으로 뿔뿔이 흩어질 때는 무능에 빠지고, 끝없는 생사의 流轉 속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번뇌 속으로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을 때 삼매의 힘은 다시 살아나고, 원래의 무한 능력이 우리에게서 한번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108배로써 108번뇌를 끊는다!’
이처럼 108배 속에는 번뇌에 휘둘리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일심의 원천으로 돌리겠다는 의지가 숨겨져 있으며 流轉이
아니라 還滅의 삶, 번뇌 이전의 영원생면으로 돌아가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삶, 곧 成佛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번뇌는 끊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하나로 모을 때 번뇌는 저절로 사라진다. 108배의 절은
번뇌를 끊는 의식이 아니라 깊은 삼매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방편(方便)이다. 우리가 매일매일 108배의
정진을 통하여 삼매 속으로 몰입할 때 우리의 번뇌는 차츰 사라지게 된다. ‘三昧와 還滅과 成佛!’
이것이 우리가 108배를 하는 까닭이며, 따라서
108배의 생활화가 참다운 불자의 삶의 모습이 되겠다. 이처럼 생활화하면 마음이 점차 모이고
맑아져서 언젠가는 삼매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되고, 불보살의 은근한 가피(冥熏加被-명훈가피)을 얻어
재난은 스스로 피해가고, 가정은 두루 편안해지며, 기쁨과
행복이 충만해지는 삶을 살게 된다.
(13) 종(鐘)소리에 대하여
아침 저녁
산사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사람의 맑고 깨끗한 본성을 깨닫게 해줍니다.“땡……”하고 울리는 종소리는 사람만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만물이 함께 듣게 되는 것입니다. 종소리는 모든 악을 타파하고 순수하고 고요한 근원의 세계로 돌아가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종소리는
듣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도 들릴 수가 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종소리를 들으면
종소리는 아름다운 음색이 되어 마음을 더 기쁘게 해주기도 하지만 슬픈 마음으로 종소리를 들으면 종소리도 슬프게 들릴 수가 있습니다.
종소리를
듣는 순간 지옥 같은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종소리를 듣는 순간 죽이겠다는 마음이 사라지고, 훔치겠다는 마음이 사라지며, 음행 하고자 하는 잘못된 마음이 사라지고, 맑고 깨끗하고 숙연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종소리의
힘은 지옥에서 갖은 고통을 받는 수많은 지옥중생이 종소리를 듣는 순간이라도 고통과 괴로움에서 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종소리는
특히 허공에 떠도는 외로운 귀신들이 종소리를 듣고 고통을 여의고 해탈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28번 종을 치는 것은 부처님 당시 가섭 존자로부터 달마대사에 이르기까지 이십팔 대 조사를 의미하기도 하고 욕계 6천, 색계 18천, 무색계 4천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저녁 공양을
마치고 예불을 드리기 전에 치는 종은 서른세 번을 치게 되는데, 서천
28대 조사와 달마로부터 6조 혜능 대사까지를 합쳐서
33대 조사를 상징하는 의미에서 서른세 번을 친다고 합니다.
(14) 본래성불(本來成佛)의 진정한 의미에 대하여
대승불교에서는
본래성불(本來成佛)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중생은 본래 성불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잘못 이해하면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말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이미
성불했는데, 성불을 위한 수행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성불’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본래성불’이라는 말은 수행의 바른 길을 제시하기 위해 이야기된 것입니다.
마조 도일(馬祖 道一)선사가 남악 회양(南嶽
懷讓)선사 아래서 공부할 때의 일입니다. 도일선사는 날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부처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좌선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회양선사가 도일선사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무엇 하러 좌선을 하는가?” 도일선사가 대답했습니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 좌선을 합니다.” 이에 회양선사는 기왓장을
가지고 와서는 숫돌에 갈았습니다. 이것을 보고 도일선사가 물었습니다.
“스님은 무엇 때문에 기왓장을 숫돌에 갈고 계십니까?” 회양선사가 “이것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 셈이네.”하고 대답하자, 도일선사가 “스님, 기왓장을
간다고 해서 그것이 거울이 되겠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회양선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좌선을 한다고 해서 부처가 되겠느냐?”라고
되물었습니다. 이 말에 도일스님은 크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 대화를
잘 음미해 봅시다. 회양선사가 도일선사에게 좌선을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수행자들이 부처가 되기 위해서 수행을 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부처와 중생이라는 분별심이 있습니다. ‘나는 중생이다. 좌선을 하여 깨달으면 중생에서 부처로 변할 것이다. 이런 기대를
가지고 수행을 하는 사람은 바른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왓장을 숫돌에 간다고 해서 기왓장이 거울이
될 수 없듯이, 중생과 부처가 따로 있다면 중생이 수행을 한다 한들 부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참모습을
살펴보면 우리는 모두가 본래 청정한 비로자나불입니다. 다만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무명(無明)에서 갖가지 분별심을 일으켜 허망한 생사의 세계에 빠져 있을
뿐입니다. 수행은 허망한 生死의 세계를 일으키고 있는 無明과 분별심을 소멸하여, 자신이 본래 생사가 없는 부처임을 자각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본래성불’은 自我는 죽지 않는다는 상견(常見)도 아니고, 죽으면 사라진다는 단견(斷見)도 아닙니다. 생사라는 생각 자체가 無明에서 일어난 허망한
망상이므로, 無明이 있으면 망상에 의해 생사의 세계가 벌어지고, 망상이
사라지면 본래 청정한 法界의 실상이 드러난다는, 연기하는 세계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無明과 妄想을 버리고 실상의 세계를 깨닫는 것이 중도(中道) 수행입니다.
(15)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 曹溪宗)에 대하여
대한불교조계종은 한국 불교의 대표
종단이다. 조계종이라는 이름은 중국 선종이 크게
흥했고 특히6조 혜능이 오랫동안 계셨던 조계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금강경을 소의 경전으로 하고, 중국 선종의 조사들
중에서 초조 달마 6조 혜능의 법손임을
천명한다.
보조국사 지눌과 태고 보우국사, 도의국사
세 사람을 종조로 보고 있으며, 누가 사실상의 종조인지에 대해서는 학설이 다양하다. 보조국사를 종조로 보는 쪽은 돈오점수를
주장한다.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성철 스님은
돈오돈수를 주장하는데, 돈오점수를 주장하면 6조의 법손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이는 법맥과
전등을
중요시하면 사자상승,
즉 스승 없이 깨닫기는 석가모니 정도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입장에서 강조한 것이다. 조계종은
공식적으로는 도의국사를 종조로, 태고 보우국사를 중흥조로, 보조
지눌국사를 중천조로 보고 있다.
(16)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에 대하여
돈오돈수[頓悟頓修]는 단 한번에 불심의 이치를
알아 구극의 깨달음에 도달하여 더 이상의 수행이 필요 없는 경지를 말합니다. 반면에 돈오점수[頓悟漸修]는 깨닫고 나서도 계속 수행하여 깨달음의 세계를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본래 돈오의 성불론은 선종에서 주장되었습니다. 즉 미망과 깨달음은
한 생각의 차이이니 본성이 단지 일념에 상응하여 중생의 자아가 바로 본심을 보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 돈오의 성불론입니다.
그런데 돈오점수 란 그렇게 한 순간에 깨달았다 할지라도 완전한 깨달음이란 순식 간에 되는 것이 아니라
불도를 차례대로 닦고 행하여 점차적으로 향상하여 완성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특히 완전한 깨달음인 돈오돈수와 깨닫고 나서도 계속 깨달음을 닦아야 하는 돈오점수의 차이는 선종의 수행론에
대한 이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 나라도 선종의 영향이 지대하여 돈오돈수, 돈오점수라는 말을
자주 쓰나 모두 깨달음을 취하는 방법에서 나온 용어입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깨닫느냐와 점차로 깨닫느냐의 문제는 돈오 속에서도 점수가 있을 수 있고, 점수 속에도 돈오의 깨달음이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완전히
깨닫는다고 할지라도 깨달은 성인은 그전의 수행과 깨달음을 계속 실천하므로 돈오 속에는 점오의
과정이 있게 됩니다.
돈오점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닫고 나서 계속 점차적으로 수행하여 단계를 밟는다 해도 그 속에는 깨달음의 찰라 찰나의 연속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돈오돈수나 돈오점수의 차별적 구별보다는 돈오 속에 점오,
점오 속에 돈오라 생각하고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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