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주요 상식 정리(2)
(6)
불교의 역사에 대하여
- 개요
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
고대 인도에서 고타마 붓다에 의해 성립된 후 지금 시대까지 계속 이어져 온 종교이다.불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교들 중의 하나이다. 불교는 인도아대륙의 동북부 지방인 마가다왕국에서 시작되어 그 후 중앙아시아, 동아시아,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었으며, 이러한 전파와 더불어 불교는 발전을 거듭하여 다양하고 복잡한 종교적 전통을 지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불교는 특히 아시아 지역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역사적으로
불교에는 많은 종파와 불교 운동이 있었는데, 원시 불교를 제외할 때 상좌부 불교, 대승 불교, 티베트 불교의 전통이 특히 중요하며 현재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불교의 성립
고타마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은
고(苦) · 집(集) · 멸(滅) · 도(道)의 사성제(四聖諦)와 생사윤회의
모습인 연기(緣起)이다. 고통(苦)의 원인인 집착(集)을
극복 또는 제거(滅)하여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방법(道)으로 제시된 것이 정견(正見) · 정사(正思) · 정어(正語) · 정업(正業) · 정명(正銘)
최초의
설법을 하고("초전법륜 · 初轉法輪") 그들을
제자로 삼았다. 이로써 불, 법, 승의 삼보(三寶)가
원시 불교 시대
(般涅槃 · Parinirvana)에 들었다. 그
후 승단은 제자인 마하가섭
등이 중심이 되어 붓다의 율과 법을
유지하게 되었다.
경전의 제1회 결집
불멸후, 곧 붓다의 가르침을 정리하게 되었는데, 붓다가 듣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 맞추어 설법한 것("수기설법 · 隨機說法")을 결집을 통해 경전으로 편집하였다. 이것을 제1회 결집이라 한다. 라자기르(왕사성)에 500명의 비구들이 모여
마하가섭을
사회자로 하고 우바리가
율을, 아난다가
법을
암송하여 붓다의 설법을 정전화(正典化)하였다. 그 후 불교는 마가다 왕국을
근거지로 여러 도시의 왕과 제후 그리고 일반 서민의 귀의를 얻으며 각지로 전파되어 갔다.
아쇼카대왕과 불교 전파
아소카 왕이 불교를 포교한 지역
기원전 317년경 찬드라굽타(Chandra
Gupta)에 의해 인도 최초의 통일 국가인 마우리아 왕조가 성립되고
제3대 왕 아소카가 즉위한
후 불교는 비약적으로 팽창하여 캐시미르와
간다라 지방을
비롯한 인도
각 지역 · 그리스의 식민지인
박트리아 · 스리랑카(실론) · 미얀마(버마) 등 국외로까지 전파되었다. 특히 스리랑카에는
아소카 왕은
자신의 아들 마힌다(Mahinda)를
보내 불교를 전파했다. 아소카 왕은
열렬한 불교 신도로서 '법(法)인 진리'에 의한 통치를 지도 이념으로 삼는 등 불교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부파 불교 시대
상좌부와 대중부의 분열 (경전의 제 2 회 결집)
싯다르타가
입멸한 후 100년이 지나자 계율(戒律) 해석을 놓고 전통적 보수파와 진보적 자유파가 대립되어 두 개의 부파(部派)로 갈라졌다. 전통적 보수파를 상좌부(上座部
– Theravada - 테라바다)라 하였고
진보적 자유파를 대중부(大衆部 - Mahasamghika - 마하상기카)라
하였다.
바이샬리(Vaisali -
毘舍離 - 비사리)에서 비구계(比丘戒)로 10사(事)를 두고 합법(合法)을 주장하는
측과 비법(非法)이라고 반대하는 측이 대립되어 분열되었다. 이를 근본2부의 분열이라고 한다. 비법을 주장하는 측이 700명의 비구를 모아 집회를 열었는데 이것을 제2회 결집이라 한다.
소승 20부
근본2부의 분열이 가져온 분열의 기운은 교리상의 견해, 지도자간의 대립, 지리적 조건 등으로 인하여
으로부터
교단의 파생적인 분열이 촉진되었다. 이에 따라 서력 기원을 전후하는 시기에는 18-20개 정도의 부파를 형성하였다. 이 여러 갈래로 분열하는 모습과
파의 이름 그리고 분파의 수에 관하여는 여러 설이 있다. 부파 발생의 주된 원인은 계율의 해석에 관한
학설 상의 차이에 있었지만, 학설보다는 지도적 장로(長老)를 중심으로 한 체제가 달랐거나 지리적으로 너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부파를 형성하는 일도 생겼다.
계윤부(鷄胤部), 다문부(多聞部), 설가부(說假部), 제다산부(制多山部), 북산주부(北山住部)의 9부와
경량부(輕量部)의 11부, 합계 20부를
들 수 있다.
이들의
성립 시기는 대략 서력 기원 전후였을 것으로 보인다.
부파 불교의 성격
이와 같은
불교의 부파적 전개("부파 불교")는
외적 확대와는 달리 성립 당시와 같은 순수성을 잃고 율(律)과 경(經)에 대한 훈고학적인 주석학에
빠졌다. 즉,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 – 法에 대한 연구)불교가 발달되어 불교는 승원(僧院) 중심, 출가 중심의
학문 불교로 변화하고, 따라서 대중성을 잃었다. 또 일부에서는
저급한 미신적 신앙에 친화감을 갖게 되어 불교는 본래의 탄력을 잃고 말았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진보적
입장을 대표하던 대중부 및 재가(在家) 불교도가 중심이 되어 불교 본래의 모습으로 복귀하려는 대승 불교 운동이
시작되었다.
대승 불교의 성립과 발전
1. 인도의 초기 대승 불교
대승 불교의 성립
대승 불교가 성립된 것은 기원전 1세기경이나, 이 움직임의 태동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대승 불교의 대두로 인하여 이전의 6세기 간에 걸친 불교를 통칭하여 소승 불교라 불러 대승 불교와 함께 오늘날까지 불교의 성격을 규정하는 2대(二大) 유파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승 불교의 대두로 소승 불교는 쇠퇴 · 소멸의 길을 달린 것이 아니라 소승 불교의 부파들은 서로 정통을 주장하며 계속 부파적 발전을 하여, 스리랑카와 같은 남방 국가로도 퍼져갔다. 스리랑카의 경우 기원후 4-5세기 동안 부다다타(Buddhadatta), 부다고사(Buddhaghosa · 覺音 · 각음)와 같은 일단(一團)의 학자들에 의해 수많은 주석서들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활동이 바탕이 되어 스리랑카의 소승 불교는 미얀마 · 타이 · 캄보디아 · 라오스 등지의 소승 불교와 함께 남방 불교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소승에 대해 대립적 자세를 취하며 일어난 대승 불교는 종래의
관점을 혁신하였다. 수행관(修行觀)에 있어서 자기 완성을 주장하기 보다 대중의 구원을 우선할 것을 주장하였다. 열반의 상태에
안주해 버리는 아라한(阿羅漢 · Arhan) 대신에 보살(菩薩 · Bodhisattva)이라는 새로운 이상적 인간상을 제시하였고 이미 열반에 들어간
역사적 인물로서의 붓다
대신에 법신(法身) · 보신(報身) · 응신(應身) 또는 화신(化身)의 삼신설(三身說)과 같은 초월적 불신관(佛身觀)을 내세웠다. 이러한 변화는 자타카(Jataka –
대승 경전의 성립
기원후 1세기 후반에 쿠샨 왕조가 성립되고
제3대 왕인 카니슈카(Kanishka - 迦腻色伽 - 가니색가: 재위 127-151)가 즉위한 후 불교는 또 다시
중흥기를 맞게 되었다. 카니슈카는
푸르샤푸라(Pursapura:
현재의 파키스탄
북서부의 페샤와르)에
수도를 정하고 북인도의 대부분과 서인도 북반(北半), 중앙
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카니슈카는
국내 각지에 불탑과 사찰을 건립하고 적극적인 불교 보호정책을 썼다. 이때 불교는 파르티아(Parthia),
소그디아(Sogdia)
지방에까지 보급되었고 이 시기부터 이곳의 학승(學僧)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불전(佛典) 번역에 종사하였다.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에 이르는 사이 대승 운동의 결실로 수많은 대승 경전들이 출현했다.
초기 대승 경전 가운데
중요한 것들은 《반야경(般若經)》·《유마경(維摩經)》·《법화경(法華經)》·《아미타경(阿彌陀經)》· 《십지경(十地經)》 등이다. 이 가운데 《반야경》은 대승 경전을 대표하는 경전으로, 이 경전에 실린 공 사상(空思想)은 대승 불교의 기본적 교리로서 불교 사상의 근본 사조를 이루었다.
2. 인도의 중기 대승 불교
중관파와 유가행파
공 사상의 기초를 닦은 대표적 인물은 남인도 출신의 용수(龍樹 · Nagarjuna: c.150-c.250)로서 그의 《중론송(中論頌 · Madhyamaka karika)》은 부파 불교가 지닌
오류를 결정적으로 논박하였다. 용수는 고타마 붓다의 근본사상인
연기설(緣起說)을 공의
입장에서 해명하여 공 사상을 철학적으로
기초 지었고,
용수 이후에 《승만경(勝鬘經)》·《해심밀경(解深密經)》·《능가경(楞伽經)》 등이 나타났다.
특히 《해심밀경》의
유식설(唯識說 - Vijñapti-mātratā)은 270년과 480년 사이에 미륵(彌勒 - Maitreya:
270-350년), 무착(無着 - Asanga: 300-370년), 세친(世親 - Vasubandhu: 4세기경) 등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유가행파가
확립되었다. 그 결과 중관파의 공 사상과 유가행파의
유식설은 중기
대승 불교 사상의 2대 조류를 형성하는 학설이 되었다.
공 사상 또는 중관 사상(中觀思想)의 중관파와 유식 사상(唯識思想)의 유가행파는
7세기에 이르러 인도
대승 불교의 주요한
학파로 군림하게 되었다. 중관파는 용수(150 – 250년) 이래 불호(佛護 - Buddhapalita:
전자는 월칭(月稱 · Candrakirti: 600 – 650년)과
적천(寂天 · Santideva: 6세기)이 계승하였으며,
후자는 적호(寂護 · Santaraksita: 8세기)와
연화계(蓮華戒 · Kamalasila: 713-763년)가 계승하였다.
유가행파는 세친(世親 · Vasubandhu: 4세기)을 계승한 진나(陳那 · Dinnaga: 480 – 540년) 계통과 덕혜(德慧 · Gunamati)와 안혜(安慧 · Sthiramati: 6세기)의 계통으로 나뉘었고 전자는 호법(護法 · Dharmapala:
530-561) · 법칭(法稱 · Dharmakirti: 7세기)이
계승하였다.
3. 인도의 후기 대승 불교
7세기는 불교사상에 있어 난숙한 발달을 보인 시기였는데 중관파와 유가행파는
불교 내부에서 상호간에 활발한 논전을 벌였을 뿐 아니라 외부의 힌두교나 자이나교의
종파들과도 논쟁을 벌였다. 인도 불교는 이렇게
대승 불교의 학파들을
형성하여 발전을 계속하였으며 그 학문적 전승을 위해 나란타(那爛陀 ·
Nalanda) 사원이 국제 대학으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발라비(Valabhi)
사원도 불교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비크라마실라(Vikramasila)와 같은 대학으로 집중되었고 승단 중심의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밀교의 성립과 발전
1.
밀교의 성립
부터 주법(呪法)으로 전해오던 것으로 주구(呪句), 진언(眞言·Mantra), 다라니(陀羅尼 · Dharani)를 송지(誦持)하여 그것으로 마음을 통일하고 구경의 경지에 도달하여 붓다(佛)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불교의 일파였다. 7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러한 사상이 조직화되고 종합되어 《대일경(大日經)》,
밀교도 대승 불교로 분류되고
있으나 인도에서
대승 불교가 쇠퇴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사상으로 평가된다. 그 이유는 세친(世親 · Vasubandhu: 4세기경) 이후 대승 불교가 지나친
철학적·이론적 경향으로 흘러 일반 대중과 유리되었는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밀교가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아비달마
불교의 지나친 철학적·이론적 경향에 대한 반작용으로 대승 불교가 발생한
것과 동일하다. 또 당시 인도에서 탄트라 문학이
유행되었고 그 풍조에 따라 불교의 밀교적
전개가 촉진되었다.
2.
금강승과 티베트 불교로의 발전
사람은
인타라부저(因陀羅部底 · Indrabhuti:
687-c.717)였다. 그의 아들인 파드마삼바바
(蓮華生 -
Padmasambhava - 연화생)는
밀교를
티베트로 전했고, 또한 당시에 인도로부터 다수의
고승이 티베트에 들어가
밀교를
중심으로 한 대승 불교를 전파하였다. 그러나 티베트에는 중국에서 온
학승들이 있어, 이들과 인도 학승 사이에
견해 차이가 생겨 혼란이 일어났다. 티손데첸(Trisong Detsen · 치쏭 데짼: 755-797) 왕은
수도 라사(Lhasa)에서
회의를 열어 논쟁을 매듭지었고, 그 결과 인도측의 점문파(漸門派)의 설이 인정되고 중국의 돈문파(頓門派)의 설은 배척되었다. 이로써 티베트 불교는 인도 후기 불교의 성격을
그 주류로 삼게 되었다. 티베트로 들어간
밀교는
머지 않아 라마교로 발전하여
티베트 고유 불교로 정착하였다.
인도 불교의 쇠퇴
불교는
인도의 전통 종교였던 브라만교에 반발하여 일어나 한때 전 인도를 거의 석권할 정도로 융성했다. 그러자
큰 위기를 느낀 브라만교의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종교 철학을 심화하여 불교의 장점을 적극 수용하면서 힌두교로 발전한 반면, 대승불교 사상 또한 점점 브라만(힌두교)와 유사해짐으로써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게 되었다. 8세기 중반부터는
금강승(金剛乘) 불교가 팔라 왕조(Pala Empire: 750 – 1174년)의
보호를 받으며 마가다(Magadha) 지방과 서벵골(West Bengal) 지방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나 이때의 불교는 이미
성장의 동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에서 오랜 세월 인도인들의 내적 정신적 지주였던 힌두교나 다를
것이 없는 상태로 변질되고 말았다. 불교는 오히려 중국 · 한국 · 일본에서
번성하였다. 이와 같이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된 것은 불교 자체가 내적으로 변화를 일으켜 미륵(彌勒), 관음(觀音),
대일여래(大日如來) 등의
부처나
보살
개념이 힌두교의 신들과
거의 같은 성격과 기능을 갖게 되었고, 12세기 말 이슬람교
군대의 침공으로 심한 박해를 받아, 승려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사원이 파괴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시아로의 불교 전파
1세기부터 10세기 사이의 대승불교의 전파 경로
인도에서 불교가 소멸된 대신 불교는 남방 아시아의 스리랑카 · 미얀마 · 타이,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 북방 아시아의 티베트 · 중국 · 한국 · 일본
등 아시아 전역으로 전파되어 각 지역의 토착 문화와 융합하여 다채로운 종교 문화를 이룩하였다.
1.
중국으로의 전파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대략1세기경이라고 추정되고는 있지만, 불교 경전의 한역(漢譯)작업은 2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행해지고, 위진 남북조 시대부터
명 시대까지
중국 불교는 크게
번창하여 독자적인 불교 문화를 형성하였다.
인도가 세계 문명의 발상지의
하나라면 중국 또한 그러한 바 이미 사상적으로 고유한 면을 많이 함유하고 있었으며, 또한 두 민족의
기질이 아주 달라 인도인은 고대로부터 형이상학에 모든 것을 걸다시피 한 반면 중국인은 현실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이런 기질에 따라 인도에서는 종교가 가장 큰 힘을 행사하였다면 중국에서는 현실을 다루는 정치가 가장 중시되었다. 따라서 인도에서 전해져 온 불교는 초기에는 중국의 고유 전통, 즉
孝 사상과 상치되어 부모자식의 관계를 접고 출가한다는 것이 상당한 부담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환경에 접하면 쉽게 현지 사상과 관습 등에 대한 포용력이 큰 불교의 장점이 道敎과 융화가 되면서, 특히나
대승불교의 핵심인 반야 사상이 유입되자 道敎를 누르고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초기 수용기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전한(前漢: BC 206-AD 8) 시대였으며 불교 경전이 본격적으로 번역된 것은 후한(後漢: 25-220) 시대에 들어와서였다. 불교의 전래 당시, 세간(世間) 또는 현세를 떠나 출세간(出世間)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는 불교의 교의는 당시의 중국의 현세주의적 사상풍토 및 효(孝)를 중시하는 유교 전통과 크게 상치되어 쉽게 수용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처음에 불교는 도교적 신앙과
결부되어 새롭게 나타난 신선방술(神仙方術)의 하나로 수용되었다. 이와 같은 불교의 초기
수용기는 대체로 전한말(前漢末)에서 4세기 말까지 약 400년간이라 여겨지고
있다.
중국 불교의 확립
전한말(前漢末)에서 4세기 말까지 약 400년간의 초기 수용기
이후, 5세기 초에서 6세기 말까지의 200년간 불교는 중국에서 착실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 시기
동안 불교 경전의 전래가 격증되고 많은 인도 승려들이 중국으로 들어왔다.
구마라습(鳩摩羅什 · Kumārajīva: 344 - 413년),
담무참(曇無讖 · Dharmakṣema:
385 - 433년),
보리유지(菩提流支 · Bodhiruci: 5세기말 - 6세기초), 진제(眞諦 · Paramārtha: 499 - 569년) 등이
나타나 많은 불교 경전과 논서들을 본격적으로 번역함에 따라 불교의 학문적, 신앙적 토대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경론(經論)을
연구하는 학파가 형성되었으며 이들 학파들은 단순한 학파를 넘어 종파(宗派)로까지 발전하였다.
이러한
종파들로는 아비달마를
연구한 비담종(毘曇宗), 《성실론(成實論)》을 연구한 성실종(成實宗), 열반경(涅槃經)을 연구한 열반종(涅槃宗), 《십지경론(十地經論)》을 주로 연구한 지론종(地論宗), 《섭대승론(攝大乘論)》을
연구한 섭론종(攝論宗) 등이 있었다.
수나라(隋: 581 – 618년)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문화의 남북 대립이 통합, 해소되고
불교계에도 신기풍이 일어났다. 6세기 말에서 8세기 초까지의
약 150년간의 시대 동안, 전대(前代)의 연구와 신앙을 기초로 중국 독자(獨自)의 불교 종파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독자적인 중국 불교 종파로는 길장(吉藏: 549-623년)의 삼론종(三論宗), 지의(智顗: 538 - 597년)의
천태종(天台宗), 신행(信行: 541 - 594년)의 삼계교(三階敎), 도작(道綽: 562 – 645년)의 정토종(淨土宗), 도선(道宣: 596 – 667년)의 율종(律宗), 규기(窺基: 632 – 682년)의 법상종(法相宗), 법장(法藏: 643 – 712년)의 화엄종(華嚴宗), 혜능(慧能: 638 – 713년)의 선종(禪宗), 일행(一行: 683 – 727년)의 밀교
등의 종파가 있었다.
선종의 성립과 발전
선종은 중국 불교의 두드러진 특징을 나타내는 종파로서
보리달마(菩提達摩: ? – 528년)에 의해 중국에 전해진 이래 육조(6조) 혜능(慧能: 638 – 713년)에 이르러 불교계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
2.
한국과 일본으로의 전파
(372년) 중국의 전진 왕 부견(符堅)의 지시로 순도(順道)스님에
의해 불교가 전래된 이래 고구려, 백제, 신라는
중국에서 전래된 모든 종파를 종합하는 종합불교(綜合佛敎) 또는 통불교(通佛敎)적 성격을 지향하면서 독자적인 불교 문화를 꽃피웠다.
또한 8세기 중엽에 백제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일본에서는 불교의 가장 고매한 면과 가장 비속한 면이 골고루 나타나게
되었다. 대승불교의 여러 종파가 각기 발달한 점에서는 인도, 중국, 한국과 다름이 없으나 거기에 일본만의 특성이 스며들어 독특한 불교 전통을 이루어 낸 것이다. 큰 특징은 강력한 국가주의적 경향을 띤 것을 들 수 있어 일례로 일련(日蓮)은 법화경을 일본 고유의 신앙과 결부시켜 정치 쪽으로 영역을 넓히려 하였으며,
창가학회(創價學會)라는 종교단체가 만들어져 일본은
물론 우리나라에도 진출하려는 바도 있었다. 또한 주술성과 죽은 자들을 위한 여러 가지 의례의 발달을
볼 수가 있으며, 거기에다 민족 신앙인 신도(神道)가 불교와 섞여 신과 부처를 나란히 집안에 모시기도 하고, 세속화의
극치를 볼 수 있는 것으로 승려들의 결혼을 들 수 있겠다. 그러나 한편으론 학문 불교의 발달로 축적된
학문적 수준은 세계 최고로 서구 지식인들에 끼친 영향도 작지 않아 이 점은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점이다.
(7) 한국 불교의 역사 및 고승(高僧)들에 대하여 (간략히)
한국의 불교는 서기 372년 고구려를 거쳐
신라, 백제에 들어온 새로운 사상으로서 한국민족과 자라온 중요한 종교사상의 하나가 되었다. 삼국시대에 육상 경로와 해상 경로를 통해 전해졌다. 기록 상 최초의 불교 전래는 고구려 소수림왕 때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소수림왕 전 시기에 불교가 상당 부분 고구려 각처에 퍼져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의 나라들이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율령체제 정비와 그 궤를 같이
한다. 불교는 도입된 이래 삼국의 주요 통치 이념이 되었으며, 고려 시대에는 정치 이념이었던 유교와 함께 가장 강력한 통치 이념이었다. 고려
후기에는 종교로서의 중요한 점인, 영적 청량제 역할을 망각하고 권력화하여 타락하게 됨에 따라 고려 왕조를
몰락으로 이끈 원인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고, 조선 초의 배불 숭유 정책을 초래케도 하였다. 그러나
세조는 불교의 영적 가치를 재발견하고
김수온 등의 건의로 이를 부흥시키기도
하였다.
신라 말기에 중국의 선종이 전파되었으며 고려 시대
이후 한국 불교는 선종을 중심으로 한 통불교, 즉 선-교(禪-敎) 양종의 통합 불교가 주축을 이루었다. 근세로 들어와서는 한국 불교의
주류가 선종이 된다. 해방 이후 비구 -
대처 분쟁 이후 비구 종단은 대한불교조계종을 중심으로 정립되었고, 조계종은 현재까지 한국 불교의
대표 종단이 되고 있다. 불교 대승 종단은 소의 경전을 중심으로 나눌 수 있다.
- 삼국시대 (三國時代)
고구려 -- 소수림왕 2년 (372년) 중국 전진왕 부견의 지시로 順道스님이 전함
백제 ---- 침류왕 원년 (384년) 인도 스님 마란난타가 전함.
신라 ---- 대륙과의 교류가 적어 새로운 종교로 수용하는 데 가장 늦음 (법흥왕 – 이차돈 순교)
이후 원광 법사, 자장 율사, 원효 대사, 의상
대사, 승랑 대사, 원측 법사, 혜초 스님, 도의선사 등
- 고려시대 (高麗時代)
대각국사 의천, 보조국사 지눌, 태고 보우 선사,
나옹 혜근 선사, 일연 선사, (요승 신돈)
- 조선시대 (朝鮮時代)
무학 대사, 매월당 김시습, 보우 대사, 서산대사
휴정, 사명대사 유정, 편양 선사, 진묵 대사
- 근 - 현대 (近 - 現代)
경허 선사, 만공 선사, 한암 선사, 용성 선사, 만해
한용운스님, 청담 스님, 효봉 스님,
경봉 스님, 성철 스님 등
(8) 인도의 초기 대승불교 철학 사상가들
1. 용수(龍樹) : 나가르주나, 중론(中論) 저술
2. 마명(馬鳴) : 아슈바고사,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저술
3. 무착(無着) : 아상가, 섭대승론(攝大乘論),아비달마집론(阿毘達磨集論) 저술
4. 세친(世親) : 바수반두,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저술
(상기 무착의 친동생)
(9) 중국의 선종(禪宗)의 도맥
1. 달마(達磨) : 중국 선종
초조
2. 혜가(慧可) : 선종 2조
- 신광(神光) “네 마음을 내놓아라. 그러면 내가 편히 해주리라.”
3. 승찬(僧瓚) : 선종 3조 - 적두(赤頭)라
불림. 신심명(信心銘) 저술.
4. 도신(道信) : 선종 4조 - 사마(司馬) 수행법으로 ‘좌선간심’ 제시
5. 홍인(弘忍) : 선종 5조 -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했다 함.
6. 혜능(慧能) : 선종 6조
- 금강경 4구게
應無所住 而生其心에서 깨달음. 법보단경(法寶檀經)저술
6조 혜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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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 행사 남악 회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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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두 희천 마조 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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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 도오 약산 유엄 백장 회해
남전 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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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 숭신 동산 양개
황벽 희운 조주 종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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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선감 임제
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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